안녕하세요. 발로 뛰는 동네 의사 야옹 선생입니다. 저는 지금 진료실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아픈 분들을 찾아가는 방문 진료와 왕진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발로 뛰는 동네 의사, 야옹 선생의 지역사회 의료일지)
지난번에 제가 민들레 의료사협의 방문 진료에서 두 가지 집중 관리 프로젝트를 말씀드렸습니다. 그중 '발 관리' 이야기는 이미 했었죠. (관련기사 바로가기 : 야옹선생은 오늘 '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나머지 하나인 '약물 관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어르신들의 경우 여러 가지 다양한 약물을 드십니다.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과 같은 만성 질환약부터 각종 통증 조절을 위한 약들, 소화가 안 되고 가스가 차서 드시는 위장약들, 노쇠하면서 대부분 겪게 되는 골다공증이나 인지기능 저하에 대한 약물들,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는 약, 어지럼증에 좋다는 약, 손발이 저려서 드시는 약.... 아픔이 늘어나는 만큼 약도 늘어나게 되지요.
하지만 약물로만 아픔이 해결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물 부작용으로 또 다른 약이 늘어납니다. 어떤 어르신이 자꾸 설사를 해서 지사제를 썼는데 알고 보니 변이 묽어지는 변비약을 쓰고 있었다거나. 진통제 때문에 위장 장애가 생겨 위장약을 계속 쓰게 된다거나, 혈압약을 드시고 어지럼증이 생겼는데 어지럼증약을 드시게 되거나 이런 식으로 말이죠. 우리나라 의료의 특성상 한 군데의 병원만 다니시는 경우는 잘 없고, 몇 군데에서 비슷하게 겹치는 약을 드시기도 하고, 여러 과마다 약을 받아 약의 가지 수가 20가지가 넘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병원 처방약 뿐 아니라 약국에서 그냥 살 수 있는 약들과 각종 건강보조식품까지 포함하면 더 많아집니다.
이렇게 많은 약을 복용하는 것을 다약제복용(polypharmacy)이라고 하는데, 세계보건기구의 정의에 의하면 '한 사람에게 복수의 약제를 동시에 투여하는 것' 혹은 '지나치게 많은 수의 약제를 투여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많은 것이 도대체 몇 가지냐는 기준은 아직 정확히 없습니다만 우리나라 연구들에서는 65세 이상 노인에서 1인당 월간 평균 처방 약 개수가 5개 이상인 경우로 보고 있고, 연구에 따라 다약제복용 비율이 44%부터 86%까지 상당히 높습니다. 10개 이상의 약을 처방받은 노인 비율도 상당하다고 합니다.
다양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다약제복용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줍니다.
첫째, 약물 부작용이나 약물 상호작용이 많아집니다. 둘째, 약물 관리하기가 힘들어져 약을 복용법에 맞게 제대로 복용하지 못합니다. 셋째, 약물 때문에 몸의 기능이 떨어집니다. 인지기능도 낮아지고 소화 기능도 떨어져 영양 상태가 나빠지기도 합니다. 특히 낙상의 위험이 증가합니다.
그래서 민들레 의료사협에서는 방문 진료 시 약물을 집중적으로 관리하려고 노력 중이고 가능하면 현재 드시는 약들은 모두 파악해두려고 합니다.
왕진을 하며 약물 관리를 했던 몇 가지 사례들을 얘기해볼까 합니다. 한 어르신은 심장질환,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전립선비대, 우울증 등으로 여기저기 병원에서 약물을 드시는데, 약물 관리가 전혀 안 되고 환자분이 호흡곤란과 가슴 답답함을 호소하며 식사도 잘 못한다 하셔서 왕진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약물 확인을 해보니 총 24 종류의 약을 아침저녁으로 드시고 계십니다. 아니 사실은 드시지 않고 있습니다. 약이 너무 많은데 식사도 제대로 못하니 못 드신다고 합니다. 약을 드시지 않으니 증상 조절이 안 되고 이를 알지 못하는 병원에서는 약을 자꾸 늘리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그러고 나니 환자는 약이 너무 많아 복용하기가 힘들어지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24가지 약 중 중복되거나 필요치 않은 약들을 정리하고 꼭 필요한 약들만 1주치 씩 아침약, 저녁약으로 구분하여 정리를 해드렸습니다.
또 다른 경우입니다. 와상 상태로 누워만 지내시는 분이시고 콧줄을 통해서 겨우 드시는 어르신인데 당뇨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기가 힘들어 계속 같은 약만 처방받아서 드셨고 최근 상태가 어떤지 걱정되어 따님이 왕진을 요청하였습니다. 댁에 가보니 어르신은 전혀 움직이지를 못하고 눈만 떴다 감았다 하는 상황이셨습니다. 당뇨 상태를 보기 위해 혈액검사를 해봤더니 당화혈색소 수치가 낮습니다. 이전에 혈당이 높은 상태에 맞춰 약을 처방받았기에 약이 과하게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경우 자칫 저혈당으로 위험할 수 있어 당뇨약을 줄여 드렸습니다.
얼마 전에는 홀로 사시는 어르신이 한 달 사이 세 번이나 집에서 넘어져 온몸에 멍이 들고 움직이기 힘들어하셔서, 상황도 살피고 낙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어르신 댁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어르신은 고혈압, 알츠하이머성 치매, 골다공증 등으로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고 계셨습니다. 이전에도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던 분입니다. 넘어짐은 주로 앉았다가 일어서는 상황에서 발생하였고 그때 어지럼증이 동반되어 있었습니다. 혈압은 정상이었지만 어르신들의 경우 심한 기립성 저혈압이 있으면 약물조절을 해야 합니다. 이뇨제 성분의 항고혈압제로 인한 것으로 보고 약물을 조절하였고 이후에는 어지럼증 없이 넘어지지 않고 잘 지내십니다.
약물 관리를 위해 방문을 하면 일단 집에 있는 모든 약들과 처방전을 요청하여 모읍니다. 물론 구석구석 숨겨진 약들도 찾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현재 필요한 약과 필요하지 않은 약을 구분하고, 필요하지 않은 약들은 회수합니다. 이후에 필요한 약들은 헷갈리지 않고 드실 수 있도록 정리를 해드리고 이후 약물 부작용 여부를 확인합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약을 참 많이 드십니다. 오래된 약들도 섞여 있고, 통에 쓰여 있는 이름과 다른 약들이 섞여서 담겨있기도 합니다.
"이 약은 어데서 받았드라?"
"이 약은 무슨 약인지 몰라요. 옛날부터 그냥 통에 있었어요."
"이 약은 통증약이지요? 변비약이라고요?"
"이 약은 하루에 몇 번 먹는 약인지 몰라서 먹었다 안 먹었다 해요."
이런 식입니다. 어떤 약이 어떤 약인지 어르신도 헛갈리십니다. 당연하지만 복용하는 약이 많을수록, 복용 횟수가 늘어나고 복잡할수록 더 약물 관리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부작용이나 기능 저하 없이 적절하게 약을 드시게 하기 위해서는 어르신들의 상황에 맞게 처방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방문 진료를 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인지기능이 떨어져 있는 분들에게는 약을 단순하게 처방해야 하고, 약을 사용하는 방법도 구체적이고 쉽게 설명드려야 합니다. 가능하면 약봉투에 크게 어떤 약인지를 써드리고, 어린이들이 봐도 금방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솔직히 의사의 역할은 약을 적절하게 잘 처방하면 끝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제대로 먹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약사님들의 일이라고 여겼고, 처방한 약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면 그것은 환자나 보호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지요.
또, 약을 늘리는 것을 쉽게 생각했음을 고백합니다. 바쁜 외래 중에 아픈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아픔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상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저 ‘자, 이 약을 드시면 좀 나아지실 겁니다.’하고 약을 하나 추가해 드리며 마무리하게 되죠. 왜냐면 참으로 부끄럽게도 약을 처방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의학, 의료인류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아서 클라인먼 교수가 쓴 책 <케어>의 한 구절을 옮겨봅니다.
적절한 진료와 돌봄의 실패는 심각한 약물 남용의 원인이기도 하다. 의사의 의욕 저하와 그래도 환자에게 무엇이든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만나면 의사는 강한 약을 처방해 주고 또 해주고 또 해주게 된다....(중략)....의사가 진정성 있는 진료에 필요한 시간과 관심을 투자하는 대신 편의를 선택하고, 그 나쁜 선택이 환자의 문제에 더 큰 문제를 추가하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적절한 약물 처방과 관리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발 관리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환자나 보호자에게 교육과 설명도 하고 끊임없이 설득해야 합니다. 약을 하나 늘리기는 쉬워도 줄이기는 어렵습니다. 아직까지 저도 부족함이 많지만 좀 더 노력해 보고자 합니다. 그래도 방문 진료, 왕진과 같은 제도들이 본격화되어 의료인들이 어르신들이 수많은 약들과 씨름하는 모습을 직접 들여다본다면, 약 하나를 늘리는 것에 좀 더 신중해지고 그분들의 아픔을 약물이 아닌 따뜻한 말과 관심, 그리고 서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