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의료생협' 7곳의 '걷기열풍'::)
3시간을 기다려 3분을 진료받는 시스템 속
에서 환자는 절대권위를 갖고 있는 의사의 권력앞에 꼼짝을 못한
다. 그러나 의료생협은 환자와 의사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며 환자와 의사가 함께 손잡고 환자의 알권리 운동을 벌인다
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인 의료자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요즘
건강을 위한 주민 자치조직인 전국 의료생협들 사이에선 걷기운동
열풍이 불고있다. 질병에 걸린 뒤 치료하기보다 운동으로 이를
예방하자는 취지다. 의료생협은 지역 사람들이 건강 의료 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만든 조합으로 94년 안성을
시작으로 인천, 안산, 대전, 원주, 전주, 서울 등 전국에 7개 �퓐沼暉昰�활동중이다.
13일 오전 11시 인천시 부평구 일신동 공원을 걷다 인천평화의료
생협이 설치한 ‘만보걷기 현황판’과 마주쳤다. 일신공원에서
인천대공원까지 5841보(222Kcal소모), 이곳에서 출발해 일산 초
등학교 운동장에 도착, 다섯 바퀴를 걸으면 2505보(93.9Kcal소모
)라는 설명이 있다.
또 백조약수터까지가면 5489보를 걸을 수 있고, 소모되는 칼로리
는 200Kcal라고 계산해 놓았다. 의료생협에서 주민들에게 나눠주
고 있는 ‘주 5일 30분씩 걷기운동’팸플릿에는 부개동 뒤쪽 마
을을 지나 낭만적인 옛철길을 따라 걸을 수 있고 산마을을 지나
백조약수터를 만날 수 있다는 친절한 코스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이날 오후 1시쯤 부개동에 위치한 의료생협 병원인 평화의원. 송
내역 부근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최송자(61)씨는 만보기를 보여
주며 아침부터 9700보를 걸었다고 자랑했다.
“죽게나 돼야 병원을 찾는 것이 보통인데 의료생협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친절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조합원
이 된 뒤 평소에도 건강 관리차원에서 병원에 자주오게 돼요. 얼
마전 넘어져 발이 겹질린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을 맞고
있는데, 의사는 체중을 빼라고 하네.”
젊은 병원직원이 “이제 병원에 오실 때도 자전거를 놔두고 걸어
다니시면 훨씬 좋아지실 거예요”라며 보다 적극적인 걷기운동을
권한다. 인천의료생협이 올해부터 벌이고 있는 생활건강 프로젝
트는 새만금사업이 아닌 ‘배만금 프로젝트’. 뱃살을 빼고 만보
걷기를 생활화하며 금연 릴레이를 벌이자는 것.
집에서 30~40분 되는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하는 김명일(37) 평
화의원 원장은 “질병치료라는 좁은 의미에서 벗어나 개인과 가
족, 지역사회가 포괄적으로 건강해지자는 것이 의료생협의 목표
”라며 “만보기를 사기 어려운 주민에게는 빌려드린 뒤 마을 행
사때까지 걸음수를 집계해 시상도 하고 뱃살을 측정해 복부비만
이적은 팀도 격려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인천 평화의료생협의 등대 모임은 일주일에
한번 중풍 후유증 등을 앓고 있는 노인들을 집안에서 모시고 나
와 평화병원 지하에 있는 사랑방에서 게임, 말벗하기, 건강체크
등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지금은 다른 단체건물을 빌려쓰고
있지만 올해 신동우(61) 인천평화의료협동조합 이사장이 자신��공장 일부를 노인 테이 케어(Day Care·주간관리) 사업을 위해
선뜻 내놓았고 9월 개원을 위해 개조작업중이다.
대전시 법동에 자리잡은 대전민들레의료생활협동조합도 건강생활
습관운동의 하나로 ‘우리마을 만걸음 걷기운동’을 벌이고 있다
. 만걸음 걷기표를 조합원들에게 나눠줬고 대전 인근의 생태문화
유산과 연결해 생태하천인 갑천 만걸음 걷기, 돌장승 찾아 만걸
음 걷기, 노거수-오래된 나무 찾아 만걸음 걷기 등 다채로운 프
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혼자 걷기보다 마을 사람 여럿이 팀을 이뤄 걷기운동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 걷기 모임을 주도하는 ‘이끄미
’도 모집하고 있다. 이끄미에게는 민들레 의료생협에서 만보기
를 무상지급하고 조합원 기본 검진을 무료로 해준다.
김모 조합원은 “지난 3월 21일부터 4월 30일까지 40일동안 2만
보이상 걸은 날 2일, 1만보이상 6일, 8000보이상 4일, 6000보이
상 9일, 5000보 이하 17일 등 총걸음수가 29만1104보로 하루 평
균 7464보에 달했다”고 걷기 실적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전민들레의료생협 활동은 공동체 화폐조직인 한밭레츠와 긴밀
하게 연계돼 있다. 의료생협을 찾는 환자들은 현금을 내지않고
이 지역 화폐인 ‘두루’를 쓸 수 있다. 상부상조하는 품앗이,
두레정신을 계승한 지역 품앗이인 한밭레츠에 가입하면 다른 회
원들에게 품을 제공하고 일정 비율의 두루를 벌 수 있다. 화폐단
위1두루는 1원과 맞먹는다.
회원 김모씨는 한밭레츠 가맹업소인 회원 홍모씨의 병원을 찾아
3000두루를 지불하고 진료를 받는다. 김씨는 한밭레츠 홈페이지
‘거래하고 싶어요’를 통해 집에서 쓰지 않는 아기침대를 1만두
루에 팔았기 때문에 진료비를 쓰고도 7000두루가 남았다.
민들레의료생협 김성훈(33) 사무국장은 “거래시의 에너지 낭비
등을 줄이고 공동체 의식 함양을 위해 공동체 화폐 두루를 매개
로 지역화폐 공동체운동을 동(洞)단위에서도 실천할 방침”이라
며 “먼저 법동지역에 보건·의료·복지 시설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민들레의료생협은 올해 유기농 반찬가게인 ‘두루부엌’도 만들
계획이다. 조합원들이 텃밭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채소 등으로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해 반찬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여기서 남긴
수익으로 돈이 없거나 반찬을 만들 힘이 모자라 고생하고 있는
지역 저소득층이나 독거노인 등에게 유기농 반찬을 무료로 배달
할 방침이다.
이런 지역 운동을 위해 상반기중에 민들레의료생협과 한밭레츠,
대안초등학교인 대전푸른숲학교, 시민참여 연구센터인 사이언스
샵, 대전실업극복 시민연대가 모여 ‘대안사회 주민연대’를 발
족시키고 소규모 자활공동체와의 네트워크도 구축할 계획이다.
전국 곳곳에서 소규모 건강마을 만들기에 나서고 있는 조직이 늘
고 있고 이들은 걷기운동을 통해 한걸음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셈이다.
예진수 전국부차장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