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이경자 이사님, 송직근 선생님과 만났습니다.
11시 까지인데 네이버에 검색하니 거리가 1시간 조금 넘어 도착한다고 나옵니다.
달리다 보니 시간이 점점 늘어 30분 늦었습니다.
다음에 간다면 넉넉히 두시간 반은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날이 참 좋았습니다.
원주에 모인 상호교류단 모두 가을 나들이 기분이라 하셨지요.
11시 반, 원주의료생협 사무실에 앉아 서로 인사했습니다.
변상훈 사무국장님께서 반갑게 맞으셨습니다.
오전에 서로 인사하고 점심식사 후, 자세히 이야기 나누기로 했습니다.
함께걸음에서 오신 유순저, 김경자 선생님은
자리에 앉아마자 적극적으로 물으십니다. 00는요? 00는 어떻게 되나요?
점심식사는 원주의료생협 최정환 이사장님 가게에서 했습니다.
최정환 이사장님은 장일순 선생님과 인연이 깊으십니다.
장일순 선생님 보증으로 밝음 신용협동조합에서 500만원을 빌려 가게를 여셨습니다.
장일순 선생님이 “종업원 쓰지 말고, 둘이서 손님을 정성껏 모시는 가게를 하라" 당부를 하셨고 20년이 지금까지도 그리 일하신답니다.
가서 보니 백발의 어르신 두 분이서 손님을 맞고 계십니다.
가게 안 이곳 저곳에는 장일순 선생님의 글, 사진이 있습니다.
이미 부대찌개 두 냄비가 끓고 있었습니다.
둘러 앉아 맛있게 먹었지요. 가게 벽면에 원주에서 난 쌀을 사용한다는 플랜카드가 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이사장님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밞음 신협 이사장 하실 때 이사장으로서 직원들에게 부탁한 일입니다.
IMF 시절, 신협도 큰 위헙을 맞았습니다. 담보가 없이 신용으로 대출을 했는데
갑작스런 위기로 빚을 갚지 못했던 사람들이 늘었던 것이지요.
이사장님은 전화로 빛독촉하면 마음이 상하니 신협 직원들이 직접 발로 뛰어야 된다 하셨답니다.
그리고 돈 만 원을 직원들 손에 쥐어 주시며 술 한 잔이라도 대접하라 하셨대요.
당시 만원이면 소주 두 병에 싼 안주 한 접시를 시킬 수 있었다네요.
우연인지 그 덕분인지 그 후 신협 사정은 나아지기 시작했답니다.
식사 후 나눈 대화로는 이사장님 인생의 나이테를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저녁 식사 후 사무국장님께 들은 이야기는 콧등을 시큰하게 했습니다.
참 귀한 분이셨어요.
사람 일 도모하는 사람은 직접 만나고 마을을 이리저리 다녀야합니다.
이사장님 만나고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식사 후 마을 꽃가게에서 화분을 샀습니다.
민들레의료생협 조세종 이사장님께서 후원하신 돈 사만 원 중 삼만 원을 썼습니다.
화분 문구는 함께걸음 국문학과 출신 유순저 선생님께서 쓰셨습니다.
오후에는 장일순 기념관에서 강의 들었습니다.
원주생협네트워크 김달현 선생님께서 원주생협네트워크가 하는 일을 소개하셨습니다.
강의의 핵심은 명쾌했습니다.
'생협은 조합원을 위해 일 하는 곳'
'생협네크워크는 지역을 위해 일 하는 곳'
생협네크워크는 원주에 있는 생협과 사회적 기업, 작은 회사들이 소속해 있고
함께 힘을 모으면 더 잘 할 수 있는 일 중에 교육(내부교육), 로컬 푸드 운동, 기금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함께걸음 유순저 선생님이 어떻게 하면 생협 연대 하는 비법을 묻자
생협의 연대는 한살람이 나서는 것이 좋다 하셨습니다.
이유는 자금이 있는 곳이 먼저 나서면 보다 자금력이 약한 생협도 쉽게 힘을 보태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소리 힘있는 단체가 나서야 한다고 이해했습니다.
생협의 협동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협동은 좋다, 협동 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닌, 지역에 발 닿아 있는 실제 일거리를 부지런히 찾고 잘 공유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김달현 선생님 강의에 이어 변상훈 사무국장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협동조합의도시 원주, 상호교류단이 되었을 때 추천 받은 곳도 원주입니다.
어떤 노하우가 있을까, 어떤 특별한 점이 있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변상훈 사무국장님께 뜻밖의 자기고백을 들었습니다.
개원 당시 장비가 없어 일 년 가까이 병원문을 열 수 없었던 일.
국가 지원이 끊기고 들어난 재정 상태, 양방의원 폐원, 의료생협 안팎의 여러 일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 순간 치열한 한 걸음 같아 보였습니다.
원주의료생협에서 저는 특별한 노하우나 비법을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기대한 것은 그곳에 없었어요.
다만 특별한 비법 없이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희망임을 압니다.
원주에 가기 전 책 '가장 인간적인 의료'에서 원주의료생협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책에 있는 재개발 지역 주민 검진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다고 여쭸습니다.
초대 양방원장님과 당시 대의원이었던 변상훈 선생님은 재개발 지역
자신의 터에서 쫓겨난 사람들 중 13가구의 건강을 살피러 다니셨습니다.
재개발지역에 사는 분들은 경제적 약자 특히 어르신들이 많으신데
그 중 건강이 몹시 나쁘신 어른 한 분을 만났고
병원에서 검사하시도록 도왔더니 페암이라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홀로 사시던 어르신의 자녀를 수소문으로 찾았더니 30년 째 만나지 못한 아들은 원주에 살고 있었습니다.
두 분이 만날 수 있게 돕고 결국 함께 사시게 되었대요.
변상훈 선생님은 책에서
'의료생협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이었다.
착한 의사가 있는 병원, 보건소와는 다른 의료생협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이해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책에서 만난 변상훈 선생님의 이야기가 실제로 들으니 더 절절히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강의 후 본 활동을 마무리했습니다.
서로 소감을 나누고 작별인사 했습니다.
송직근 선생님, 이경자 이사님과 변상훈 선생님 모시고 녹두전과 막걸리 한 잔 했습니다.
수 많은 정치 아젠다가 술자리에서 생겨나고 또 해결된다지요.
보다 편하게 이야기 나눴습니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변상훈 선생님께 최정환 이사장님 이야기를 더 들었습니다.
술을 350일 드시고 마을을 세 시간 동안 걸어 다니시며 생협 둘러 보시는 일. 밝음신협 이사장 시절 겸험.
이야기 하시는 모습이 꼭 동네 어른 존경하며 따르는 젊은이 모습입니다.
의료생협 내외의 여러 이야기를 송직근 선생님 이경자 이사님께서 공감하며 들으십니다.
이경자 이사님, “눈물 나..”, “눈물 난다.: 몇 번이고 말씀하셨지요.
대전으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변승훈 선생님과 잠깐 둘이서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 잠깐 들은 이야기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어려운데도 50년 후의 비전을 생각하신다니 놀랍다 말씀드렸더니
저는 먼저 간 선배들의 발자국이라도 있으니깐요. 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우리는 이런 꿈을 꾸죠. 트렌토는 지금 6대째 생협이 이어지고 있어요.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겁니다.
원주는 한국에서 트렌토가 될 수 있는 곳이에요.
제가 결혼 한지 3년인데 아직 아이가 없어요.
내 아이가 태어나 뒤 이을 수 있는 토양은 만들어 놓고 싶어요.
앞으로 오십 년을 생각하는 변승훈 선생님.
먼저 앞을 내다 본 사람, 선각자는 외롭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도 그런 분들 많지요. 저는 해오리가 떠올랐어요.
원주의료생협이 다시 양방의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들레 의료생협은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양방을 홍보했던 팜플릿, 포스터, 디자인 양식, 발표자료. 당장 이런 것들이 떠올랐어요.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누님은 알고 지낸지 10년이라.” 이경자 이사님과는 포옹을 피하셨어요.
송직근 선생님은 “서로 배가 나와서 으하학학학~끌끌” 하고 서로 안으셨습니다.
“다시 또 놀러 올게요.”
지금은 대전으로 돌아가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어요.
가슴 한켠이 묵직합니다.
둔산동 민들레에서 빌려 간 ‘가장 인간적인 의료’ 원주의료생협 첫 페이지에 변승훈 사무국장님 사인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