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왕진이야기] 동네 의사, 필요할 때면 언제든 가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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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mindlle) | 작성일 | 2020-11-12 | 조회수 | 6968 |
동네 의사, 필요할 때면 언제든 가겠습니다
[발로뛰는 동네의사 야옹선생의 지역사회 진료일지] 기다리는 사람들
박지영 민들레 의료사협의 지역사회의료센터장
안녕하세요. 야옹선생입니다. 저는 가정의학과 의사로서 왕진과 방문 진료를 통해 지역사회의 아픈 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처음 방문 진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저는 방문 진료가 필요한 분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우리나라는 의원이나 병원 수도 많고 조금만 기다리면 당일 진료도 가능하여 의료접근성이 좋은 나라니까요. 특히 대전 같은 도시에서는 더욱 그렇고요. 그래서 원할 때 병원에 마음대로 가는 것이 어떤 분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임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과거의 저는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삶이 실제로 어떤지, 병원에 가기 위해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문을 열고 집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백 미터를 걷는 것이 그분들에게 얼마나 힘들 수 있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얼마 전 방문한 중년 남자분은 10여 년 전 교통사고로 경추가 골절되어 상하지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치기 전 워낙 활동적이었던 분인데 갑작스럽게 장애가 생긴 뒤로 홀로 힘겨운 삶을 사셨다고 합니다. 건강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도 생겼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 담배를 많이 하셔서 다시 건강이 나빠지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닥을 엉덩이와 어깨로 밀고 다니시며 발생한 만성 통증과 우측 귀의 오래된 중이염, 양쪽 발의 발톱 무좀과 변형, 양쪽 손의 심한 굳은살과 습진이 이분을 괴롭히는 주된 원인입니다.
이분은 중증 장애인으로 장애인 건강 주치의 대상자이지만 그동안 방문 진료를 계속 거부하였습니다. 아마도 방문 진료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시고 낯선 사람들이 와서 귀찮은 일만 생길까 봐 걱정하셨던 것이겠지요. 술 담배도 많이 하시고, 고집도 있고 사람을 경계하는 분이라고 들어서 사실 저도 겁을 좀 먹고 갔습니다.
첫 방문 날, 인사를 드리고 조심스럽게 가장 불편한 점을 여쭤보니 좌측 귀에서 자꾸 소리가 나서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귀를 확인해보니 머리카락 하나가 떡 하니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제가 제거할 수 있는 위치라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여드렸더니 엄청나게 좋아하십니다.
"아이고, 내가 이것 땜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제야 잡았네~.“
머리카락 제거를 계기로 신뢰 관계가 조금 만들어졌습니다. ▲ 귀를 진찰하는 야옹선생. ⓒ박지영
다음으로 발을 보여 달라고 하니 엄청 곤란해 하시다가 겨우 양말을 벗으시는데, 무좀도 있고 발톱 변형도 심합니다. 준비해 간 도구들을 꺼내놓고 장갑을 끼고 열심히 발톱을 정리 해 드렸습니다.
엉망이던 발톱이 정리가 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다친 후에 죽고 싶어서 자살 시도를 했었던 일,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던 일, 장애인이라서 서러움을 겪었고 그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던 일들도 얘기하십니다. 가만히 들으니 조금 열린 그분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다음 방문 날에는 가서 아픈 어깨에 주사를 해드렸습니다. 주사 맞을 때 소리를 지르며 엄살을 부리셨지만 제가 등짝 스매싱을 날려가며 진정시켜드리니 고분고분 잘 맞으셨습니다. 발톱무좀약도 가지고 와서 바르는 방법을 교육해드렸더니 넌지시 이것저것 건강에 대한 문의들을 하십니다.
햇볕을 충분히 못 쬐어 비타민디가 떨어진 것 같은데 처방이 되느냐, 골다공증 검사는 어떻게 하느냐, 간이 나쁘다고 해서 술을 많이 줄였다, 담배는 끊기가 힘들다, 아파트로 이사 가서 휠체어라도 맘껏 타고 싶다..... 진짜 원하는 것들을 얘기하기 시작하십니다.
방문 진료를 마치고 나오려 하니 다음에는 언제 또 오냐고 물어보십니다. 코로나 상황에 따라 결정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그렇지요~ 아이고 그러면 언제 또 나오시나~“
이러십니다. 언제 또 오시냐는 그 물음에 왠지 마음이 시큰합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하시라고, 그러면 제가 나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이분은 의사를 한번 만나기 위해 온갖 애를 끓여야겠지요. ⓒ박지영
이제는 제가 정말 이분의 건강 주치의가 되었다고 느낍니다. 이분의 아픔을 제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아프다고 연락이 오면 찾아가 살펴보고 치료를 해드리고, 건강을 위해 생활 습관을 바꾸시도록 말씀드립니다. 이런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어서 낯가림 심했던 이분도 저와 방문의료팀에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이 정말 필요하다시며, 본인은 10점 만점에 10점을 줄 정도로 만족하다고 하십니다. 마지막 방문 날에는 심지어 만성질환에 대한 공부를 해서 다른 장애인들에게 알려주는 활동도 해보시겠다고 합니다.
지금도 의사, 가정간호사, 작업치료사의 방문을 기다리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장애가 있어서,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집에 갇혀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별것 아닌 작은 문턱이나 계단 몇 개가 이분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마찬가지입니다. 방문을 나갔을 때 반가워하시며 왜 이제야 오느냐고 타박 아닌 타박을 하는 분들에게 혼자 방에서 견뎌야 했던 시간은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 시간이었을까요.
제가 만나는 분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드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힘든 일이 있을 때 상의할 사람이 있다는 것, 같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든 홀로 고립되어 아프지 않도록 하는 일, 지금 민들레 의료사협이 하려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니까요.
박지영 민들레 의료사협의 지역사회의료센터장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020111109192665170#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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